2003년에 열린 제75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부문에 오른 후보작들은 다양한 시대와 사회적 배경 속에서 인간 내면의 복잡함을 치밀하고 섬세하게 표현했다. 사랑과 정체성, 억압과 자유, 상실과 성장을 순간에 담았다. 그 중 가장 조용한 목소리로 가장 깊은 울림을 남긴 작품이 각본상을 수상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제75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후보작과 수상작 및 수상 이유를 알아본다.
1. 각본상 후보작, 각본가 소개
《그녀에게》 페드로 알모도바르
《파 프롬 헤븐》 토드 헤인즈
《갱스 오브 뉴욕》 제이 콕스, 스티븐 자일리언, 케네스 로너건
《나의 그리스식 웨딩》 니아 바달로스
《이투마마야》 알폰소 쿠아론, 카를로스 쿠아론
2. 각본상 후보작 정보, 줄거리, 키워드.
1) 《그녀에게》
“그녀가 듣지 못해도 괜찮아. 중요한 건 네가 말한다는 거야”
‘마르코’는 여행 작가로, 스페인의 여성 투우사 ‘리디아’와 인터뷰를 하다 그녀와 가까워진다. 하지만 리디아는 투우 경기 도중 부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지고, 마르코는 병원에서 그녀 곁을 지키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젊은 무용수 알리시아를 돌보고 있는 간호사 ‘베니그노’를 만난다. 베니그노는 의식이 없는 알리시아에게 애틋하게 말을 걸고 일상을 돌보지만, 그 감정은 점점 집착에 가까워진다. 사실 그는 알리시아가 사고 전부터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고 사랑해왔던 인물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두 남자는 다른 방식으로 사랑과 상실을 받아들이며,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각자의 고독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느 날, 병원 측은 혼수상태였던 알리시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베니그노가 그녀를 성폭행했을 가능성으로 체포한다. 베니그노는 자신이 한 행동을 사랑이라 믿으며, 죄책감 없는 채 감옥에 갇힌다. 한편, 리디아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상실감에 빠진 마르코는 병원을 떠난다. 하지만 얼마 후, 알리시아는 깨어나고 건강을 되찾는다. 이 사실을 모른 채 베니그노는 감옥에서 고립된 삶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사랑이 때로 얼마나 위험하게 선을 넘을 수 있는가.
사랑과 집착, 헌신과 침묵의 경계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또다시 누군가를 통해 회복하려고 하는가.
키워드 : 사랑, 소통, 침묵, 고독, 헌신, 윤리적 경계
2) 《파 프롬 헤븐》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다.”
1950년대 코네티컷, 교외의 잘 정돈된 거리에서 ‘캐시 휘태커’는 누구나 부러워할 삶을 살고 있다. 그녀는 헌신적인 아내이자 자애로운 어머니로, 사교계에서도 빛나는 존재다. 하지만 남편 ‘프랭’크가 은밀히 동성애적 욕망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캐시의 이상적인 세계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녀는 집안의 흑인 정원사 ‘레이먼드’와 대화를 나누며, 가부장적이고 인종 차별적인 사회가 억압해온 감정과 인간적 교감을 발견한다.
이웃들과 사회는 캐시가 레이먼드와 우정을 나누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한다. 남편은 자신의 정체성에서 도망치려 하고, 캐시는 점차 자신이 속해 있던 사회적 규범에서 소외된다. 캐시의 내면은 불안과 슬픔으로 가득 차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자유롭고 솔직한 자신을 깨닫게 된다. 그녀가 마주하는 사회는 개인적 해방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캐시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완벽한 가정의 허상을 지키느냐, 아니면 모든 것을 잃더라도 진실한 삶을 택하느냐.
사회적 틀에서 벗어난 사랑과 우정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키워드 : 1950년대 미국, 인종차별, 동성애, 사회적 위선, 고독, 자유
3) 《갱스 오브 뉴욕》
“이 도시는 피로 지어진다. 우리는 그 피의 대가를 잊어선 안 된다.”
1846년 뉴욕은 이민자들의 피와 노동, 폭력으로 뒤엉켜 있었다. 어린 ‘암스테르담’은 아일랜드계 토착민 아버지와 함께 ‘도살자’라 불리는 ‘빌 커팅’이 이끄는 네이티브 아메리칸 갱단과의 전투에 나선다. 눈앞에서 아버지가 빌에게 살해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그는, 수년간 복수심을 가슴에 품고 고아원에서 자라난다.
세월이 흐른 후, 암스테르담은 빌의 신임을 얻기 위해 그의 조직에 들어간다. 빌은 냉혹한 폭력과 잔혹함으로 뉴욕을 지배하는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자신의 규칙과 명예를 중요시하는 복합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암스테르담은 그에게서 묘한 카리스마를 느끼며, 복수와 존경 사이에서 내적 갈등에 휩싸인다. 도시에서는 권력, 부패, 이민자 차별이 얽히고설키며, 정치와 폭력의 경계는 사라져간다. 결국 암스테르담은 빌과의 마지막 대결에 나서며, 자신이 잃어버렸던 정체성과 아버지의 유산, 그리고 새로운 뉴욕을 위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마주한다.
복수는 인간을 구원하는가, 아니면 더 깊은 폭력의 굴레인가?
권력과 정의는 어디서 맞닿고, 어떻게 타락하는가?
키워드 : 복수, 폭력, 권력, 이민자, 정체성, 뉴욕의 기원
4) 《나의 그리스식 웨딩》
“내 인생은 내 것이야. 내가 선택할 거야.”
‘툴라 포틀라코스’는 시카고의 그리스계 대가족에서 태어나 평범한 식당 직원으로 일하며 살아간다. 그녀의 가족은 전통과 관습에 강하게 얽매여 있고, 툴라는 한 번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해 본 적이 없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과보호하는 부모, 결혼 적령기라는 사회적 압박 속에서 그녀는 점점 더 무기력해진다. 그러던 중, 툴라는 식당에서 우연히 비그리스계 남성 ‘이안’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고수하며 두 사람의 관계를 극도로 경계하고 간섭하기 시작한다. 이안은 낯선 문화와 가족의 간섭 속에서도 툴라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툴라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인생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가족과의 충돌을 감수하기로 결심한다.
결혼식 준비 과정에서 겪는 크고 작은 해프닝과 오해, 그리고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불편함과 따뜻함 속에서 툴라는 마침내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결혼식이 열리는 날, 가족과 문화적 차이를 넘어선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진다.
가족과 전통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자립할 수 있는가?
사랑은 문화적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키워드 : 가족, 문화 충돌, 전통, 자아 찾기, 사랑, 성장
5) 《이투마마야》
“인생의 목적지는 없어. 중요한 건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배우느냐야.”
멕시코시티의 무더운 여름. 두 소년, ‘훌리오’와 ‘테노치’는 권태와 욕망, 젊음의 충동 속에 살아간다. 부유한 집안 출신의 테노치와, 노동자 계층 출신인 훌리오는 단순한 친구 같지만, 그들 사이에는 은연중에 계급적 긴장과 경쟁심이 흐른다. 어느 날, 그들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아름답지만 슬픔에 잠긴 여성 ‘루이사’에게 떠돌이처럼 해변 여행을 제안한다. 루이사는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고, 내면의 공허함을 안은 채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세 사람은 낡은 자동차를 타고 멕시코의 황량한 시골과 작은 마을들을 지나며, 육체적 호기심, 질투, 갈등, 그리고 잠깐의 해방을 경험한다.
여행이 진행될수록 루이사의 비밀, 두 소년의 성장통, 계급과 성의 긴장감이 폭발하고, 서로에 대한 감정의 본질이 드러난다. 여행의 끝자락, 그들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른의 세계를 마주한다.
욕망과 자유, 상실은 어떻게 성장과 맞닿아 있는가?
계급과 정체성은 관계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키워드 : 성장, 욕망, 자유, 상실, 여행, 계급, 청춘
3. 제 75회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 및 수상 이유
각본상 수상작:
《그녀에게》 페드로 알모도바르
《그녀에게》 수상장 및 선정 이유:
《그녀에게》의 각본은 상투적인 사랑 이야기에서 벗어나, 인간 감정의 깊은 곳을 건드리는 독창적 구조와 테마로 아카데미의 심사위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언어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감정과 헌신이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치밀하게 탐구하며, 사랑과 집착, 고독과 소통의 경계를 모호하게 풀어낸다. 두 남자의 내면 심리와 상실의 고통을 교차시키며 관객을 침묵 속으로 끌어들인다.
베니그노와 마르코라는 두 인물을 통해, 윤리적 딜레마와 인간 존재의 고독함을 미묘하게 직조해내며, 관객은 도덕적 판단을 보류한 채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게 된다. 대사는 절제되어 있지만, 그 침묵과 여백 속에서 사랑과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관객에게 남기며, 단순한 감정적 울림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복잡함을 아름답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