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에 열린 제78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부문에는 다양한 장르와 주제를 담은 다섯 편의 영화가 후보로 올랐다. 인종 갈등을 다층적 이야기로 풀어낸 드라마부터 매카시즘 시대 언론의 투쟁을 그린 작품, 현대 런던을 배경으로 한 범죄 로맨스, 이혼 가정의 성장통을 그린 독립영화, 중동 석유 정치를 다룬 스릴러까지 후보들은 서사와 메시지 면에서 뚜렷한 개성을 보였다. 각 후보작의 줄거리와 키워드를 정리하고, 뛰어난 완성도로 사회적 울림을 인정받은 수상작이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를 살펴본다.
1. 각본상 후보작, 각본가 소개
《크래쉬》 폴 해기스, 로버트 모레스코
《굿 나잇 앤 굿 럭》 조지 클루니, 그랜트 헤슬로프
《매치 포인트》 우디 앨런
《오징어와 고래》 노아 바움백
《시리아나》 스티븐 개건
2. 각본상 후보작 정보 : 줄거리, 키워드.
1) 《크래쉬》
“우리는 접촉에 너무 목말라 서로 충돌해서라도 무언가를 느끼려 해”
다양한 인종과 계층이 뒤섞인 도시 로스엔젤리스. 흑인 형사 ‘그레이엄’은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동시에, 마약 중독자인 어머니와 잃어버린 동생 문제로 내면의 갈등을 겪고 있다. 백인 경찰 ‘라이언’은 병든 아버지를 돌보며 의료 시스템과 사회 변화에 대한 불만을 품고, 그 분노는 흑인 여성 ‘크리스틴’을 모욕하는 폭력적 행동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이후 교통사고 현장에서 같은 여성을 구해내며 스스로의 편견과 마주하게 된다.
흑인 TV 감독 ‘캐머런’은 경찰의 부당한 대우와 사회적 차별 속에서 자신의 자존심과 가족을 지키려 애쓴다. 그의 아내 크리스틴은 남편의 소극적 태도에 실망하며 부부 간의 갈등이 깊어진다. 또 히스패닉 자물쇠 기술자 ‘다니엘’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성실히 일하지만, 이민자라는 이유로 고객들에게 불신받는다. 페르시아계 가게 주인 ‘파라드’는 다니엘을 오해해 총을 들고 그의 집에 찾아가고, 그의 어린 딸이 위험에 처하는 순간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난다.
지방검사 ‘릭’은 정치적 입지와 이미지에 민감한 백인 검사로, 자신의 경력을 위해 흑인과 히스패닉 공동체와의 관계를 관리하려 한다. 그의 아내 ‘진’은 강도 사건 이후 히스패닉 이웃과 서비스 노동자들에 대해 극단적으로 불신하며 불안을 느끼고, 무의식적인 인종 편견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녀 역시 주변 사람들, 특히 히스패닉 가사 도우미가 보여주는 따뜻한 배려 속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경험하게 된다.
서로 다른 인종, 계급, 가치관을 가진 인물들은 모두 로스앤젤레스라는 도시 안에서 충돌하고, 오해하며, 때론 구원받는다. 영화는 이처럼 인간 내면의 편견, 두려움, 죄책감, 연민이 어떻게 일상에서 얽히며, 누구나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각자의 삶이 부딪히는 과정 속에서 작은 이해와 변화가 가능하다는 희미한 희망을 남긴다.
다인종 사회에서 만연한 편견과 불신을 과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키워드 : 인종차별, 편견, 다문화 사회, 오해와 화해, 교차되는 운명
2) 《굿 나잇 앤 굿 럭》
“Good night, and good luck.”
1950년대 미국, CBS 뉴스룸의 간판 앵커 ‘에드워드 R. 머로우’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반공 마녀사냥을 주도하던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에 맞서 목소리를 낸다. 머로우와 프로듀서 ‘프레드 프렌들리’ 및 동료 기자들은 군에서 부당하게 해직된 한 공군 장교의 사연을 다룬 방송을 계기로 매카시의 위험한 선동 행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생방송으로 송출된 머로우의 날카로운 논평은 미국 사회에 만연한 맹목적 반공 분위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는 방송국 경영진과 광고 스폰서들의 불만을 초래하며 제작진에게 압력과 긴장을 안겨주었다.
동료 기자 ‘돈 홀렌벡’은 끊임없는 비방에 시달리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빠졌고, 뉴스팀 내부에도 두려움이 감돌았다. 그럼에도 머로우는 언론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굴하지 않고 매카시의 실태를 고발하는 방송을 이어갔다. 결국 머로우의 보도 이후 높아진 여론의 비판에 직면한 매카시 의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상원으로부터 공식적인 견책을 받는다.
권력의 압력과 사회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진실을 말할 용기가 있는가,
민주사회에서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키워드 : 언론의 자유, 매카시즘, 저널리즘의 양심, 진실 규명, 용기
3) 《매치 포인트》
“유능하기보다 차라리 운이 좋기를...”
영국 런던, 한때 프로 테니스 선수였던 ‘크리스’는 상류층 가문의 딸 ‘클로에’와 결혼해 부유한 사회에 입성한다. 하지만 그는 친구의 약혼녀였던 매력적인 미국 여성 ‘놀라’에게 강하게 이끌려 몰래 불륜 관계를 이어간다. 시간이 흐르자 놀라는 크리스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크리스는 안정된 사회적 지위와 열정적인 사랑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는다.
결국 그는 은밀한 관계를 영원히 숨기기 위해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만다. 크리스는 애인 놀라와 그녀의 이웃을 살해한 뒤, 사건 현장을 강도 피해로 위장했다. 살인을 저지른 후 죄책감과 불안에 시달리던 크리스는 경찰 수사가 점차 자신을 향하자 극도로 긴장한다. 그러나 결정적 증거 하나가 우연히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면서 그는 체포를 모면한다. 범행의 증거로 던진 반지가 강가 난간에 걸려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감으로써 크리스는 예상치 못한 행운 덕분에 자신의 죄를 감춘 채 일상을 이어간다.
인간의 삶에서 도덕성과 양심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노력과 선함보다 우연한 행운이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가
키워드: 욕망과 유혹, 불륜, 범죄, 양심의 가책, 행운과 우연 등이었다.
4) 《오징어와 고래》
“어렸을 때 박물관에서 오징어랑 고래가 싸우는 게 무서워서 손가락 틈으로 지켜봤다.”
1980년대 중반 뉴욕 브루클린, 지식인 부부 ‘버나드’와 ‘조안’은 오랜 갈등 끝에 별거를 결심한다. 문학 교수인 아버지 버나드는 한때 촉망받던 소설가였으나 지금은 창작의 슬럼프에 빠져 있다. 어머니 조안은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글을 발표하며 작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두 아들인 16세 ‘월트’와 12세 ‘프랭크’는 부모의 불화와 이혼으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월트는 지적인 아버지를 우상시해 그의 견해를 그대로 따르며 어머니를 원망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문학과 음악을 통해 자신의 혼란을 표출했지만 내면의 불안은 커져갔다. 한편 어린 프랭크는 부모의 관심을 끌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충동적인 행동을 보였다. 프랭크는 학교에서 부적절한 행동을 일삼고 어린 나이에 술을 마시는 등 방황하며 아픔을 드러냈다.
시간이 흐르며 형제는 부모의 불완전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혼란에 빠진다. 이상화했던 아버지가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어머니 역시 실수를 저지르는 인간임을 깨달으며 정서적 혼돈을 겪는다. 결국 월트는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분노와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는 어린 시절 무서워했던 자연사 박물관의 ‘오징어와 고래’ 모형 앞에서 복잡한 감정을 마주하며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부모의 이혼으로 아이들은 어떤 상처를 받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키워드: 가족 해체, 성장통, 부모와 자식 갈등, 상처와 치유
5) 《시리아나》
“부패는 우리를 안전하고 따뜻하게 지켜준다. 부패야말로 우리가 승리하는 이유다.”
베테랑 CIA 요원 ‘밥 반스’는 중동 현장에서 비밀 작전을 수행하던 중 상부로부터 버림받고 희생양이 되었다. 그는 석연찮은 명령에 의문을 품고 진실을 파헤치려 했지만, 오히려 조직의 표적이 되어 목숨까지 위협받는다. 한편 에너지 분석가 ‘브라이언 우드맨’은 개혁 성향의 중동 왕자 ‘나시르’의 재정 고문으로 합류하여 거대 석유 기업과 왕실 사이의 은밀한 거래를 목격했다. 브라이언은 이전에 중동에서 어린 아들을 잃은 개인적 비극을 겪었기에 왕자의 이상에 공감하면서도 복잡한 심정을 지니고 있었다.
젊은 파키스탄 노동자 ‘와심’은 석유회사들의 합병으로 일자리를 잃고 절망에 빠져 이슬람 급진 세력에 가담했다. 삶의 벼랑 끝에 선 그는 지하드 조직의 세뇌로 자폭 테러를 준비한다. 동시에 미국 변호사 ‘베넷’은 두 거대 석유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부패를 수사하라는 임무를 받지만, 수사를 가장해 일부 하급자들의 죄만 폭로하고 거대 기업들의 이익을 지켜주는 결정을 내린다. 이상을 꿈꾸던 나시르 왕자와 진실을 좇던 밥 반스는 거대한 음모에 휘말려 결국 목숨을 잃는다.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석유를 둘러싼 부조리한 세계 질서는 계속해서 굴러간다.
세계 에너지 패권을 둘러싼 부패와 폭력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로 인한 희생은 누구의 몫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키워드: 석유 이권, 국제정치, 부패와 음모, 테러리즘, 희생의 대가
3. 제 78회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 및 선정 이유
각본상 수상작 :
《크래쉬》 폴 해기스
《크래쉬》 각본상 선정 이유 :
《크래쉬》는 다수의 인물과 에피소드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인종 차별이라는 주제를 입체적으로 부각시킨 치밀한 구성으로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았다.
일상의 작은 충돌에서 비롯된 편견과 갈등을 예리하면서도 인간적으로 풀어내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하나의 주제로 수렴되는 독창적 서사는 사회적 메시지와 드라마틱한 감동을 모두 잡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뛰어난 완성도와 의미를 인정받아 《크래쉬》가 제78회 아카데미 각본상의 영예를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