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제67회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작에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후보에 올랐다. 그 중 전통적인 서사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캐릭터를 보여준 작품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다섯작품의 후보작들과 수상작이 각본상을 수상하게 된 이유를 알아본다.
1. 후보작 및 각본가 소개
《펄프 픽션》 쿠엔틴 타란티노(각본, 원안), 로저 아바리 (원안)
《브로드웨이를 쏴라》 우디 앨런, 더글러스 맥그레이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리처드 커티스
《천상의 피조물》 피터 잭슨, 프랜 월시
《세 가지 색: 레드》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크쥐시토프 피에즈비치
1) 《펄프 픽션》
범죄자 커플 ‘펌킨’과 ‘허니 버니’가 한 식당에서 평범하게 아침 식사를 하다가 갑작스레 무장 강도로 돌변한다. 이어서 정장을 입은 두 킬러, 말이 많은 ‘줄스’와 감정이 없는 ‘빈센트’가 보스 ‘마르셀러스’의 명령으로 조직을 배신한 남자들을 살해한다. 이때 줄스는 성경 구절을 읊으며 살인을 철학적 행위로 포장한다.
빈센트는 마르셀러스의 아내 ‘미아’를 하룻밤 동안 경호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러나 미아는 약물울 과다 복용해 의식을 잃고 만다. 빈센트는 공포에 휩싸여 마약상인 ‘랜스’의 집으로 그녀를 데려가고, 아드레날린 주사를 놓아 극적으로 마야의 목숨을 구한다.
복싱 선수 ‘부치’는 마르셀러스와 승부 조작을 하기로 한 약속을 깨고 도망친다. 부치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황금 시계'를 찾으러 집으로 가다가, 마르셀러스와 마주친다. 쫓고 쫓기던 둘은 어느 변태에게 걸려 지하실에 감금되어 고문을 당한다.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부치는 마르셀러스를 구하고, 그들은 침묵 속에 협정 아닌 협정을 맺고 제 갈길을 간다.
줄스와 빈센트는 식당에서 무장 강도 행각을 벌이는 펌킨과 허니 버니와 맞닥뜨린다. 줄스는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지만, 이전의 살인에서 신의 계시를 느낀 그는 강도들을 살려 보낸다.
폭력은 인간의 삶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상을 점령하는가?
우리가 믿는 정의, 구원, 윤리는 얼마나 상대적인가?
키워드: 비선형 구조, 포스트모던, 범죄, 윤리, 폭력, 구원, 대사, 팝컬처, 재즈 리듬의 영화
2) 《브로드웨이를 쏴라》
“작가는 신이 아니야. 단지 사람일 뿐이지.”
‘데이비드 셰인’은 자신의 연극을 브로드웨이에서 올리기 위해 후원자를 찾던 중, 갱스터 ‘닉 발렌티’의 제안을 받는다. 조건은 단 하나, 자신의 여자친구 ‘올리브 니일’을 무조건 출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올리브는 아름답지만 연기 경험도 없고, 말투도 촌스럽기 짝이 없었다. 데이비드는 올리브를 보며 자신이 현실과 타협했다고 생각하고 절망한다. 그런데 올리브의 연기를 도와주기 위해 따라온 갱단원 ‘치치’가 데이비드의 대본을 보며 끊임없이 수정 제안을 한다. 놀랍게도 그의 조언은 그럴듯했고, 결국 데이비드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치치의 조언을 받아들이게 된다.
데이비드는 치치가 극본에 미치는 영향이 커질수록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는다. 자신이 창작자라고 믿었던 연극이 점점 치치의 작품으로 변해 간다고 생각한다. 한편, 치치는 점점 연극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결국 연극의 완성도에 올리브의 존재가 해가 된다고 판단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올리브를 살해하면서까지 예술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그의 행위는, 아이러니하게도 데이비드보다 더 이상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연극은 대성공을 거두지만, 데이비드는 더 이상 예술을 위한 희생을 감당할 수 없다고 느끼고, 연극계에서 물러나 평범한 삶을 선택한다.
예술은 윤리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가?
키워드: 예술과 타협, 창작, 도덕, 갱스터, 연극, 메타픽션, 풍자, 브로드웨이, 뉴욕 1920년대
3)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찰스’는 결혼을 믿지 않는 독신주의자로,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점차 자신의 삶과 사랑에 대해 고민한다. 어느 날,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그는 미국인 ‘캐리’와 운명처럼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된다. 두 사람은 강하게 끌리지만, 각자의 상황 때문에 관계가 진전되지 못한 채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일이 반복된다.
찰스는 네 번의 서로 다른 결혼식에서 캐리를 계속해서 마주치며, 점점 그녀에 대한 감정을 키워간다. 그러나 캐리는 이미 약혼했고, 결국 찰스는 그녀가 결혼식에서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장면을 지켜본다. 실망과 상실 속에서도 그는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캐리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다.
찰스의 친구 중 한 명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이 사건은 찰스와 친구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삶과 사랑,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찰스는 자신의 진짜 감정을 비로소 깨닫는다. 결국 찰스는 자신의 결혼식장에서 신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음을 고백한다. 결혼은 무산되고, 빗속에서 캐리와 마주한 찰스는 자신의 진심을 전한다.
진정한 사랑은 결혼이라는 형식에 얽매여야 하는가?
인연과 타이밍이 엇갈릴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사랑은 언제 시작되고, 언제 확신이 생기는가?
키워드: 로맨틱 코미디, 결혼, 인연, 엇갈림, 유머, 우정, 상실, 감정의 진화, 영국식 감성
4) 《천상의 피조물》
1950년대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영국에서 이주해온 소녀 ‘줄리엣’은 당차고 지적이며, 공상과 글쓰기를 즐기는 문학 소녀다. 어느 날 그녀는 학교에서 내성적이지만 창의적 상상력으로 가득 찬 ‘폴린’을 만나고, 둘은 곧바로 강한 유대감을 형성한다. 폴린 역시 가난한 집안에서 무관심한 부모와 살아가며 감정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다. 두 소녀는 현실 세계에서 느끼는 소외와 단절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공상 세계 ‘보로벨리아’를 창조한다. 둘은 그 속에서 판타지, 로맨스, 어둠이 뒤섞인 세계를 마음껏 누비며, 현실의 고통과 불안을 지워낸다. 하지만 이 상상은 점차 현실을 잠식해간다. 두 사람은 점점 강박적인 친밀감에 빠지고, 그 관계는 단순한 우정 이상으로 깊어지며, 타인과의 단절을 강화시킨다. 특히 폴린은 줄리엣과의 세계를 삶의 전부로 여기게 되고,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그 환상에 투사한다.
줄리엣의 부모는 두 소녀의 관계를 우려해 그녀를 남아프리카로 보내려 하고, 이 사실은 폴린에게 절망 그 자체로 다가온다. 줄리엣과 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은 점차 극단적인 방향으로 향하고, 폴린은 어머니가 자신들의 관계를 가로막는 ‘장벽’이라 느끼기 시작한다. 결국 그들은 줄리엣의 이민을 막기 위해, 폴린의 어머니를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한가로운 오후, 함께 산책을 나간 숲길에서, 두 소녀는 벽돌이 담긴 양동이로 폴린의 어머니를 무참히 공격한다.
억압된 감정은 어떻게 현실에서 폭력으로 터져나오는가?
어린 시절의 고독은 인간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
키워드: 실화 기반, 여성 서사, 상상력, 우정, 강박, 환상과 현실, 억압, 청소년 심리
5) 《세 가지 색: 레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실이 있다.”
젊은 모델 '발렌틴'은 정직하지만 외롭게 살던 중, 자신의 차로 어느 개를 치게 된다. 다친 개의 목줄을 보고 찾아간 곳은 은퇴한 법관의 집이다. 그는 냉담하고 무심하며, 세상과 거리를 둔 채 홀로 살아가고 있다.
발렌틴은 그가 주변 이웃들의 전화를 무단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비난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모습은 감시할 때 더 명확해진다고 태연하게 말한다. 발렌틴은 처음엔 그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점차 그 남자의 고독과 삶에 대한 후회를 직감한다. 법관은 젊은 시절 스스로 정의롭다고 믿었지만, 정작 사랑과 감정에는 솔직하지 못했고, 그 결과 깊은 외로움에 갇히게 되었다. 발렌틴은 그에게 따뜻한 인간적 온기를 전하려 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조금씩 변해간다.
또 하나의 인물, 로컬 법대생 ‘오귀스트’. 그는 여자친구의 배신을 알게 되고 충격에 빠진다. 오귀스트와 발렌틴은 직접적으로 만나지 않지만, 두 인물의 삶은 아주 미묘하게 얽힌다. 영화의 마지막, 페리 해협 유람선 침몰 사고에 살아남은 단 7명의 명단 속에 발렌틴, 오귀스트, 그리고 《세 가지 색》 시리즈의 다른 인물들이 함께 존재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구원받은 이들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연결과 운명의 실체를 증명해준다.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으며, 이해하려고 애쓰는가?
진실은 말해질 때 완성되는가, 들켜질 때 존재하는가?
키워드: 운명, 연결, 감시, 고독, 구원, 세대 간 교감, 침묵, 감정의 미세함, 철학
3. 제 67회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 및 선정 이유
각본상 수상작 :
《펄프 픽션》 쿠엔틴 타란티노(각본·원안), 로저 아바리 (원안)
《펄프 픽션》 각본상 선정 이유 :
995년 아카데미 각본상은 기존의 영화 문법을 파괴하고, 장르와 스타일, 캐릭터, 서사를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한 《펄프 픽션》에게 돌아갔다. 줄거리를 순차적으로 배열하지 않고 시간과 장면을 뒤섞음으로써, 관객이 스스로 이야기의 구조를 꿰맞추게 만든다. 이 퍼즐 같은 구조는 단순한 전개 이상의 ‘이야기하는 방식’ 자체가 영화의 핵심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