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제7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인간 내면의 상처와 소외, 타인과의 관계에서 피어나는 미묘한 감정들을 정교하게 담아낸 작품들이 각본상 후보작에 이름을 올렸다. 영화는 시대와 공간, 문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소통'의 의미를 탐색했다. 이들 작품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생각해보고, 수상작이 작품상의 영예를 안게 된 이유를 살펴본다.
1. 각본상 후보작, 각본가 소개
《야만적 침략》 드니 아르캉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소피아 코폴라
《더티 프리티 씽》 스티븐 나이트
《니모를 찾아서》 앤드류 스탠튼, 밥 피터슨, 데이비드 레이놀즈
《천사의 아이들》 짐 셰리던, 나오미 셰리던, 커스틴 셰리던
2. 후보작 줄거리
1) 《야만적 침략》
"가장 야만적인 것은,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가장 잔인할 때다.“
캐나다 퀘벡의 한 병원, 60대 대학 교수 ‘르미 드로앙’은 말기 암으로 병원에 입원한다. 그는 젊은 시절 자유롭고 진보적 가치관을 추구하며 살았지만, 세월이 지나 삶과 인간관계에 염증을 느낀 채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할 날을 기다린다. 그의 임종을 앞두고, 과거 연인이었던 여성들, 옛 친구들, 과거에 멀어졌던 아들 ‘세바스티앙’이 찾아온다. 세바스티앙은 성공한 금융인으로, 아버지 르미와 달리 현실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다. 어릴 적 아버지의 방임과 바람기, 이념적 집착에 실망하며 감정적으로 멀어진 상태였다. 처음에는 냉담하게 거리를 두던 세바스티앙은 점차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며 감정적인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병원의 열악한 환경을 견디기 어려워한 세바스티앙은 자본과 인맥을 동원해 아버지를 더 편안한 공간으로 옮기고, 아버지가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또 르미의 오래된 친구들을 한자리에 모아, 르미의 마지막 시간을 의미 있게 채워주려 한다. 예전처럼 정치, 사랑, 사회에 대한 토론을 벌이지만, 이제는 모두가 나이 들고 병들고 상처 입은 상태로, 그들이 지녔던 이상이 무상하게 느껴진다. 이들은 과거의 상처, 사회의 부조리, 인간관계의 모순을 마주하며 르미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채운다. 한편, 세바스티앙은 아버지의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심지어 약물 중독자인 여성을 고용해 불법적으로 헤로인을 구하고 아버지에게 투여한다. 세바스티앙과 르미 사이의 감정적 벽은 점점 허물어지고, 둘은 비로소 서로의 상처와 삶의 방식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마지막 순간에 남기는 것은 무엇인가?
키워드: 죽음, 인간관계, 사회비판, 가족, 회한
2)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다시는 여기 오지 말자. 이렇게 좋았던 적은 다시 없을 테니까.“
한물간 미국 배우 ‘밥 해리스’는 위스키 광고 촬영을 위해 도쿄에 머물고 있다. 밥은 낯선 언어와 문화, 삶의 공허함과 정체성 혼란에 빠져 있다. 아내와의 관계는 소원해진지 오래다. 형식적이고 공허한 팩스만 주고받으며, 밥은 호텔 방 안에서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보낸다. 한편, 사진작가 남편을 따라 도쿄에 온 젊은 대학원생 ‘샬롯’ 역시 자신의 삶과 관계에 공허함을 느끼며 호텔에서 외로이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은 같은 호텔에서 머물며 몇 번 우연히 스쳐 지나가고, 결국 호텔 바에서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고독을 직감적으로 알아본다. 둘은 함께 도쿄를 돌아다니며 노래방, 거리 산책, 파티 등을 통해 서로의 상처와 공허함을 공유하고, 서로가 가진 외로움을 위로한다. 밥은 샬롯에게 중년의 무력감과 가족과의 거리감을 털어놓고, 샬롯은 자신의 정체성 혼란과 결혼 생활에서의 고립감을 솔직히 이야기한다.
도쿄의 번쩍이는 불빛과 낯선 소음 속에서, 밥과 샬롯은 함께 나눈 짧은 대화와 침묵 속에서 점점 더 깊이 연결되어 간다. 결국, 밥의 일정은 끝나고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지막 공항 가는 길, 복잡한 거리에서 밥은 샬롯을 발견하고, 조용히 그녀를 안고 속삭인다. 그 속삭임의 내용은 들리지 않지만, 둘만의 감정과 공감이 완벽히 전해져온다.
우리는 고독 속에서 어떻게 타인과 연결될 수 있을까.
낯선 도시 속에서 길 잃은 두 영혼이 어떻게 서로의 언어가 되는가.
키워드: 고독, 소외, 소통, 감정, 타인과의 연결, 정체성
3) 《더티 프리티 씽》
"우리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가장 깨끗한 얼굴로 가장 더러운 일을 한다.“
런던의 낡은 호텔에서 일하는 나이지리아 출신 불법 체류자 ‘오쿠웨’는 낮에는 택시 운전사로 일하고, 밤에는 호텔의 프런트 데스크에서 일하며 힘겹게 생계를 유지한다. 과거 나이지리아에서 의사였던 그는 영국 사회에서 합법적인 지위가 없다는 이유로 의료인이 아닌 저임금 노동자로 살아간다. 어느 날, 호텔 객실에서 심장 없는 시체를 발견한 오쿠웨는 충격을 받지만, 불법 체류자 신분 때문에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고 이를 숨긴다. 호텔에서 함께 일하는 터키 출신의 하녀 ‘세나이’ 역시 불법 체류자로, 꿈은 작은 가게를 차리는 것이다. 그녀 역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존재로, 숙소와 직장에서 항상 착취와 위협에 노출돼 있다. 오쿠웨와 세나이는 조심스러운 관계로 시작하지만, 점점 서로를 의지하며 가까워진다.
오쿠웨는 계속해서 호텔 손님들과 직원들 사이에서 수상한 거래가 이뤄지는 것을 눈치챈다. 결국 그는 호텔 지배인 ‘스네페’가 불법 이민자들의 신분을 이용해 장기 밀매를 알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쿠웨는 의사로서의 양심과 자신이 처한 불법 체류자의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세나이가 불법 체류로 인해 공장에서 쫓겨나고, 체포될 위기에 처하면서 상황은 절박해진다. 오쿠웨는 가짜 장기 제공자를 내세워 스네페를 유인한 후, 그가 거래를 시도하는 순간, 경찰에 모든 사실을 제보하면서 스네페를 함정에 빠뜨린다.
마지막으로, 오쿠웨는 영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세나이에게 합법적인 삶을 시작할 기회를 제공하고 공항으로 떠난다.
정의와 생존 사이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착취당하는 존재들의 존엄성은 어떻게 지켜질것 인가.
키워드: 불법 이민, 장기 매매, 사회 부조리, 인간 존엄, 선택
4) 《니모를 찾아서》
“계속 헤엄쳐. 무엇이 와도 계속 헤엄치는 거야.”
호주 대보초에 사는 흰동가리 ‘말린’은 과거 포식자에 의해 아내와 수백 개의 알을 모두 잃고, 단 하나 남은 아들 '니모'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며 살아간다. 그 사건 이후, 말린은 극도로 조심스럽고 불안한 성격이 되어 니모를 과하게 보호한다. 하지만 니모는 한쪽 지느러미가 작아 헤엄치기 어렵지만 활발한 성격으로 바깥세상을 향한 모험심과 호기심이 가득하다. 첫 학교 소풍 날, 니모는 말린의 지나친 간섭에 반발심을 느끼고, 교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지역인 '보트가 머무는 구역'까지 헤엄쳐 나간다.
니모는 시드니의 치과의사인 스쿠버다이버에게 붙잡힌다, 말린은 니모가 붙잡혀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절망하지만, 아들을 구하기 위해 무작정 바다로 뛰어든다. 말린은 엉뚱한 성격의 물고기 ‘도리’를 만나고, 둘은 상어 떼, 해파리 떼, 고래, 그리고 거북이들의 도움을 받아 대양을 횡단하게 된다. 평소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있던 말린은 타인을 믿고 상황을 유연하게 받아들여야 함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다. 한편, 니모는 치과 의사의 어항 속에서 다양한 친구들과 만나게 된다. 치과 의사가 니모를 조카에게 선물로 주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니모는 용기와 재치를 발휘해 탈출을 시도한다. 말린과 도리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시드니 항구에 도착하고, 니모는 어항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결국 바다로 빠져나온다. 마침내 아버지와 아들이 극적으로 재회하게 되고, 말린은 이전처럼 니모를 지나치게 보호하지 않고, 그의 독립심과 모험심을 존중한다.
두려움이 사랑을 지배할 때,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가?
키워드: 가족, 모험, 성장, 두려움, 용기
5) 《천사의 아이들》
“슬플 땐, 슬픈 대로 받아들여야 해.”
1980년대 초,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부부 ‘조니’와 ‘사라’는 막내 ‘프랭키’를 병으로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두 딸 '크리스티'와 '애리얼'을 데리고 더 나은 삶을 찾아 미국 맨해튼의 허름하고 낡은 아파트에 정착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조니는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여러 오디션을 보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사라는 임시직으로 가계를 돕는다. 두 딸은 낯선 도시와 힘든 환경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호기심과 밝은 에너지로 적응해 나간다.
가족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미스터리한 이웃, 흑인 화가 ‘마테오’와 인연을 맺는다. 마테오는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지만, 아이들과 점점 친밀해지고, 조니와 사라 부부에게도 위로와 희망을 주는 존재로 된다. 특히 두 딸은 마테오와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며 그를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사라는 예상치 못한 임신을 하게 되고, 가족의 삶은 또 한 번 큰 시험대에 오른다. 가난과 프랭키의 죽음,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도 가족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결국 마테오의 희생과 따뜻한 관심, 그리고 가족 간의 사랑이 이들에게 치유와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준다.
상실과 고통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은 타인의 아픔을 통해 어떻게 성장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가?
키워드 : 이민자, 상실과 치유, 가족, 희망, 꿈, 에이즈, 희생.
3. 제76회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 및 선정 이유
각본상 수상작 :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소피아 코폴라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각본상 선정 이유: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말로는 다 전달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고독과 정체성 혼란, 그리고 소통의 본질을 일본 도쿄라는 낯선 도시를 배경으로 섬세하게 풀어냈다. 대사는 절제되어 있지만, 침묵과 시선, 공간 속 공기의 흐름을 통해 인물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보브와 샬롯이라는 두 인물이 서로에게서 발견하는 이해와 위로는 언어를 초월한 감정의 교류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개인의 외로움, 관계의 공허함, 세상과 단절된 감각을 그 어떤 화려한 사건 없이도 담담하게 표현해낸 각본의 미니멀리즘과 감성적 깊이가 각본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정서적 절제와 인간 심리에 대한 섬세한 통찰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감정의 '여백'을 언어보다 더 강하게 전달한 수작으로 평가받았다.